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33개월 간 여행(군대...)
    여행기 & 여행 사진 2009. 5. 30. 07:53

    ***** 이제부터 33개월 간의 긴 여행을 간단하게 쓰려 합니다. *****

    33개월의 여행(?)요 ????
    군대 입니다. 군대요.

    제가 군대가기위한 신체검사를 언제 받은 줄 아십니까 ?
    아마 1973년 5월 12일 일 겁니다.
    왜 날짜까지 기억 하냐구요 ?(정확한지 모르나.)
    그날이 제가 대학들어가서 처음 맞는 축제의 마지막날
    '쌍쌍파티' 하는 날 이었거든요. 그 축제에 참석하곤 맺어지는
    커플이 많다고 소문난 그 쌍쌍파티 날에 저는 처량하게도
    부산에서 '징병검사'를 받았습니다.


    요즘 대학 축제는 '대동제'라고 하고 좋은 우리말로 쓰지만
    그때는 또 그 시절 답게 영어로 '페스티발' 에 '파티' 이런
    말들을 썼습니다. 3월달에 어떤 여학생(고등학교때 써클 같이한
    멤버중 1명)에게 일찌감치 축제 파트너로 초대해서 약속까지
    받아 놓았는데 말입니다.(그거 취소하느라 혼났습니다.)

    "장정 박 인근 갑종 1급 합격 !" 이거 였습니다.


    저라고 왜 군대를 가기 싫어하지 않았겠습니까 ?
    하지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저히 방법이 없더라구요.
    하다못해 방위도 안되더라구요. 아버님 정정하시고 형이 있으니
    '부 선망 독자.' 안되고 '3대 독자' 더욱 안되고 사지 멀쩡하니
    '병(病)으로 등급 낮추기' 안되고... 요즘에 나오는 별별 해괴한
    방법들은 그때는 소개도 안되었고 몸에 칼을 대고(인대 어쩌고
    하는 것 말입니다.)하는 것은 더욱 싫고, 어떤친구는 허리를
    요상하게 꼬아서 사진을 찍으면 '척추이상'으로 나와 방위가
    된다고 하는데 거기 협조해줄 '의사 선생님'을 알지도 못하고
    고전적인 방법으로 '가슴에 납가루 칠하기'(폐병으로 판정
    된다나요 ?), '마늘 과 생강 으께어서 항문에 한 2일 붙이기'
    (치질로 판정 된다나요 ?) 이런 것이 나돌 때니 확실한 보장도
    없는데... 그냥 가기로 했습니다. 국민의 의무는 꼭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범생이'가 달리 수를 쓸 수가 있습니까 ?

    위에 열거한 방법도 미리 알았던 게 아니라 부산의 징병
    검사장에서 대기하는 중 장정들의 '노가리'를 통해서 또는
    징병관이 겁주는 말에서 '저런 시도를 했던 녀석도 있구나.'
    하고 알게된거죠. 대부분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1973년이 저물어가던 시절 이때 이몸은 '연애의 홍역'을 심하게
    앓던 시기 였습니다. 사랑병으로 살빠지던 시절에 구세주처럼
    날아온 게 '영장'(입영안내서) 이었습니다. 1974년 1월 14일
    집결지는 부산에 있는 모 초등학교 운동장 이었습니다.

    1974년 1월 13일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사실 군대가 어떤 곳인지 또 훈련이 어떤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는것이니 담담하게 갔지만 만약 일가
    친척 중 가까운 사람에게 군대얘기, 특히 군대에서 축구하는
    얘기를 들었다면 달라졌을지 모르죠.(안 가려고 했을지....)
    단지 6촌 형님(촌수가 맞는지 ?)이 군에서 수송병으로 복무하다
    사고로 돌아가시는 불상사가 있었기에 '수송병은 절대
    하지마라.'는 엄명만 받고 가는 것입니다.

    부산에 있는 국민학교 동창 4명(남1, 여3)이 조촐한 환송회를
    해 주었습니다. 이때의 고마움을 아직 다 갑지 못했는데
    이 지면을 빌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언젠가는 그 보답을
    하겠다는 약속도 드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1월 14일 오후 입니다. 집결지 근처 이발소에
    들러서 머리를 깍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이 머리가 언제
    다시 길어질까 ? 3년 후 ?' 하여튼 빡빡머리로 집결지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갔습니다. 부모님, 친지, 애인 등등... 입대하는
    장정보다 환송객이 한 3배나되는 행사장(?) 이더라구요.
    저야 혼자 아닙니까. 속 편하더라구요. 다른 청춘들 구경할
    여유도 생겼으니까요.

    "조국의 부름을 받아 영광스러운 병역의무를 다하기위해
    여기오신 장정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확성기에서는
    이런 말이 쏟아져 나오지만 모두들 표정은 굳어 있기만
    했습니다.
    "자, 앉아번호(이거 3년동안 죽도록 많이 들었던 소리 입니다.)
    하겠습니다. 1렬부터 시작 !" 말씨도 부드럽게 하는 헌병
    아저씨의 지시에 따라 "하나, 두울, 셋...." 한 수십번 쯤
    했을 겁니다. 겨우 인원파악이 다 되고 가까운 역에서 대기하던
    '입영열차에 탔습니다.
    그때부터 무릅에 머리를 쳐박고 훌쩍대기 시작하는 장정,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엄마 !'를 왜쳐 부르는 아들,

    창밖으로 손 내밀어 애인 손을 꼭 잡고있는 연인들...

    드디어 군악대의 연주로 입영열차 출발을 알려 왔습니다.
    곡명은 기억이 안납니다만, '진짜사나이'가 아니었나 십습니다.
    객차안의 장정 중 한 3분의 1이 훌쩍거리고, 동네친구를 만난
    청춘은 앞으로 군생활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바쁜데
    환송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차가 달려가자 집결지에서
    '나긋나긋함'의 극치를 보여주던 헌병아저씨가 갑짜기 '악마'로
    돌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너희들은 장정이다.
    민간인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 장정이란 말이다 이 새끼들아 !"
    (이때만 해도 정식으로 훈련소에 투입되지 않으면 군복무로
    인정도 안 해주는 장정 상태로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헌병'의 악다구니는 한 한시간쯤 계속 되었는데
    "내가 니들 논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회물을 쏘옥 빼 줄께 !"
    하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죠. 논산까지 가는
    한 7시간동안 말입니다. '취침', '기상', '앞으로 굴러', '뒤로',
    '대가리 박아', '열', '차' 등등의 '기합지시어' 대부분을
    입영열차 안에서 배울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 였습니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기관사 아저씨는 기차를 잘도
    몰아 가더라구요. 여기저기서 심심하면 '으악', '시정하겠....'
    이런 말이 마구 들려왔습니다.

    밤 12시가 넘어 불이 환히 켜진 논산훈련소 '수용연대'로
    들어가는 우리 장정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신세였고
    처음 들어가 본 군대 내무반은 솔직히 '거지소굴'이었습니다.
    퀴퀴한 냄새, 흐미한 백열등, 먼저 입영해서 아직도 안 팔려
    장정신세인 먼저온 청춘들(세수를 안해서 얼굴엔 반들반들한
    기름기와 겨울이라 석탄가루까지 붙어있으니 '거지왕초'와 꼭
    같았습니다.)...

    장정생활 1주일 쯤 인가요 ? 갑종 1급만 연병장에 모으더라구요.
    "지금부터 내가 차렷! 구호를 하면 한 줄씩 '차렷자세'를
    취한다. 두 무릅이 붙으면 '헌병', 안 붙으면 '하사관 학교'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이게 기간병이 한 말입니다.
    그러자 뒤에서 수군 거립니다. '야, 헌병은 8주 후반기 훈련,
    하사관 학교는 26주. 훈련소 6주 합쳐도 14주인 헌병이 낫지
    않겠냐 ?' 이런 소리 '하사관 학교 훈련은 사람 잡는다더라.
    서로 마주보고 거총해서 정조준 발사 하면 총알이 중간에서
    서로 맞부딪혀 튕겨야 되고 빗나가면 둘다 죽는단다.'하는
    황당한 얘기까지 오갑니다. 죽자사자 무릅을 붙였죠.
    그래서 군번 12431735 를 받고 병과는 050 이었습니다.

    사격 불합격하고 연병장에서 팬티하나 입고 딩군얘기, 극장에서
    벙거지모자 강탈 당하고 다른 내무반 가서 조달한얘기,
    식사당번하다 남은 밥(바게츠 라고 합니까 ? 거기 반쯤남은 밥
    요즘 식당에서 한 25공기정도 만들 양 이었습니다.)을 4명이서
    20분만에 해치우고도 배탈 안난얘기 등등은 이젠 아련한
    추억입니다.

    용산역에서 마중나온 행정학교의 기간병을 따라 군용버스를
    타고 달려간 행정학교는 '또 다른 지옥'이었습니다.
    '장 병천'이름도 기억 합니다. EBC(이게 무슨 약자인지 아직도
    모릅니다.)330기 중대장님의 이름 입니다. 우리는 '염라대왕'
    이라고 불렀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길이가 1미터도 넘는
    5파운드 곡괭이 자루를 질질끌며 '따블빽 메고 선착순 !' 하는
    구호가 염라대왕이 "네 죄를 니가 알렸다 !" 하는 소리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한 다섯번쯤 선착순으로 혼을 쏙 뺀 교육생을
    내무반에 모아놓고 소지품(돈, 담배 등이죠)을 몽땅 압수하고
    고난의 8주 훈련에 대해 안내를 해 주었습니다. 구 대장(내무
    반장을 그렇게 불렀습니다.)의 인상은 왜 그리도 험악한지...
    '제식훈련', '교통정리', '체포구금', '폭동진압', '수감자 감시',
    '경호' 등 '군 사법 경찰 리'로서 해야할 것들을 다 배웠죠.
    이때 첫 면회가 허용 되었는데 통닭을 사온 친구들에게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한 마리를 다 먹었다고 아직도 그때
    얘기를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수경사 또는 국방부에서 오토바이 타는 헌병은 사고가 날
    확률이 많으니 거긴 가지마라." 지금은 돌아가신 매형의
    친구가 해준 귀띰 입니다. ROTC 가 그렇게 끈끈한 정이
    있는 줄 그때 알았습니다. 매형과 ROTC 동기라는 분이 마침
    행정학교의 교관으로 있어 저의 생활은 다른 녀석들 보다는
    쪼금 편했습니다.

    '군수기지 사령부 헌병대' 였습니다. 부산에 있다는 말에
    좋아했죠. 부산의 군수사에서 발령 대기 중에 식당에서의
    사건은 애교에 가까웠습니다. 꼭 단체가 모이면 꼴통이
    한 두명 있죠 ? 군수사 식당에서 라면을 먹다 취사병과 우리
    신삥 헌병이 다투게 되었습니다. 라면이 담긴 식기가 몇번
    날아다니더니 취사병이 밥을 뜨는 삽을 들고 나타나
    '다 죽인다 !'고 길길이 뛰는 겁니다. 우리는 삽에 맞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 때 싸이렌 소리와 함께 나타난 선배 헌병들은
    구세주와 꼭 같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식당안이 난장판이
    되었는데도 후환이 하나도 없더라는 겁니다.

    '6대대 28중대' 최종 발령 받은 부대 입니다.
    지금은 없어 졌으니 위치 얘기해도 되겠죠. 본부는 대전과
    유성사이 3관구 사령부(지금은 아파트 촌으로 변해 있습디다.
    부대는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옆에 있고, 27중대는 부산
    군용화물 이동 경비. 28중대는 대전 병력 이동 관리, 29중대는
    용산 서울 이북지역 검문소 운영(주요 역에 위치).
    이게 6대대의 임무인데 60년대 70년대 초에 군인들에게
    이 부대가 얼마나 원성을 받았는지 배치 받은 지 3달만에
    부대가 해체 되더라구요. 대전역 옆에서 보초서며 지나가는
    민간인은 실컷 보았습니다.

    부대 해체와 함께 다시 따블빽을 싸고 찾아간 곳이 의정부에
    있던 보충대. 여기서 '9사단 헌병대'(한때는 여기서 근무
    했었다는 얘기를 못했습니다. '노 태우'씨가 사단장 이던 때에-
    물론 저는 그전에 제대 했습니다 만- 군대를 끌고 총부리를
    꺼꾸로 돌려 내려왔던 그 사건, 12.12 를 일으킨 부대 였기
    때문 입니다.) 였습니다. 월남까지 갔다가 귀국해서 제대를
    앞둔 고참 등등. 결국 여기서 의무실에 두번 갔습니다.
    약 타러 가는게 아니라... 한번은 고래 잡으러... 또 한번은
    술취한 고참이 휘두르는 야전삽에 맞아(자다가) 머리가
    터져서 꿰메러...(3바늘 기웠습니다.)

    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영창근무, 군화 빼돌리는 군인 붙잡기, 휘발류 빼내는 군인
    검거, 훈련중 부대 놓친 녀석 잡으러 다니기, 탈영해서
    사창가의 여자를 인질로 삼아 대항하는 녀석 체포하러가기,
    국군의 날 행사에 '공이' 없는 빈총으로 경호하기, 잔디 구하러
    남의 묘지근처를 파헤쳐 놓기, 전방으로 가는 포탄 경호 등등..

    8.18 도끼만행 사건과 북한의 땅굴 발견도 이 시기 였습니다.
    중대장과 수송관의 눈들이(4개) 지켜보는 가운데서 치뤄진
    '부재자 투표'도 이때 있었습니다.

    군대에서의 투표가 얼마나 황당하게 이뤄 졌는지...

    요즘은 바뀌었을 겁니다만...

     

    그 도끼만행(1976년 8월) 때는 진짜 제대말년에

    전쟁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취침 때도 완전군장에 제 관물대(개인 보급품을 두는 선반 같은 것)

    위에는 M-16 실탄 400 발도 놓여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부대의 임무인 포로수용소 관리를 위해

    만약의 일이 벌어지면 포로수용소를 설치항 장소(학교)에

    가서 설치 도면까지 만들었으니까요.

     

    그 때 동기녀석이 한 말이 기억 납니다.

    "차라리 잘 되었네. 현역일 떄 전쟁나서... 그리고

     쫄병이 아니라 고참 병장이니 그래도 좀 낫겠지...."

    그리고,

    1976년 10월 12일 33개월의 긴 여행을 마치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 온 날 입니다......

    '여행기 & 여행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집 꽃 밭(2009년)  (0) 2009.07.07
    신혼 여행  (0) 2009.07.07
    "린.벨리 오솔길(Lynn Valley Trail)"  (0) 2009.05.29
    2009년 봄 '그라우스(Grouse) 산'   (0) 2009.04.30
    '진해'에서 '인천함을 타고....  (0) 2009.04.17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