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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국 행 비행기를 처음 타다.
    여행기 & 여행 사진 2009. 9. 5. 14:38

    **** 외국 행 비행기를 처음 타다. ****

    (*** 이 글은 2005년에 쓴 것을 2009년에 옮겨 썼습니다. ***)

     

    1982년 8월, 저도 유학 이라는 것을 가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농반진반'으로 생활기록부에 적을 희망대학을

    '하버드'와 '옥스포드'로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담임께서

    '서울 대학교'로 수정(?)해서 써 놓았더라 구요. 하지만 아쉽게도

    위의 세 곳 대학은 저와 인연이 없었습니다.

     

    '유신시절'에 대학을 다니고 군에도 갔다 온 제가 졸업할 무렵인

    1979년 가을 '10.26' 이라고 흔히 부르는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때는 취업경기가 좋아 대학 4학년들은 이미

    취직이 되어 합격한 기업 중 골라가는 청춘도 즐비했고 또

    10월부터 학교의 묵인(?)아래 출근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런 청춘 중의 한 명으로 당시 월급을 많이 주기로

    유명한 '단자회사(투자금융회사)'중의 하나인 '중앙투자금융'에

    입사가 확정되었고 10월 1일부터 출근을 했습니다.

    '10.26'을 꺼낸 이유는 그날이 '금요일'이었고 다음날인 10월

    27일 토요일은 제가 사랑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문제를

    상의하기 위한 '양가의 상견례'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0.26'으로 인한 계엄령 때문에 27일의 거사가 차질을 빚을까

    노심초사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한달 반 후 '대머리 육군소장'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쥐는 '12.12'사건이 있었고...... 다음해(1980년) 5월

    '광주사태'가 발생했고 그 광주사태의 원인이 된 '국보위'라는

    해괴한 단체가 사태 하루 전에 탄생하면서 '전두환'위원장이 국정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가수 '조 용필'의 '허공'처럼 '서울의 봄'은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였습니다. (실제 이 '허공'

    이라는 노래는 민주화의 기대로 온갖 군상들이 '내노라'하던

    '1980년 서울의 봄'이 꿈처럼 '하나회'의 군화 발 아래 짓밟힌

    시절을 통탄한 노래 입니다.)

     

    그때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기억들만 있습니다. 이 시절에

    고난을 당했던 '이 해찬 총리'가 자신을 박해한 '전.노 정권'은

    용서할 수 있어도 자신이 박해 받을 때 관심을 가지고 옹호해

    주던 '동아, 조선'일보는 용서를 못한다고 최근(2004년)에

    일갈하여 저를 깜짝 놀라게 했지만...... 신문검열, 구 정치인 구속,

    정치활동 금지자 발표, 어용정당 창당, 국회해산 등 별별일이

    다 있었습니다.

     

    물론 이 총리는 이런 생각을 할 지 모르죠. 오늘의 자기를

    있게 해 준 세력이 바로 그때의 '신 군부'였으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데모만 할 줄 아는 자신을 '민주투사'로 만들어

    주었으니 용서가 아니라 '감사'해야 할 지도 모르죠. 그런데

    신문은 뭡니까? 바로 말도 못하고 은근히 돌려 겨우 표현해서

    '행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게 써 놓고

    그걸 잘했다고 하고...... 요즘엔 자기가 잘 못한다고 마구마구

    써 대니 얼마나 밉겠습니까?

     

    이런 와중에 '공포정치'로만 몰아갈 신 군부는 아니죠. 그들도

    사람인데...... '당근'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당근 중에

    '통행금지 해제', '교복 자율화' 도 있었지만 제 귀가 번쩍

    열린 것이 '해외유학 자유화' 와 '대학교 정원 대폭 증원'

    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정원을 두 배로 늘여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또 고3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겠지요.

    조금 실력이 모자라던 학동들도 원하는 대학에 안심하고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대학들도 좋았겠죠. 등록금 늘어나는 게

    얼마입니까? 그러니 그 많은 학생들을 모두 강사에게 수업을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당연히 교수가 필요하겠죠.

    그 시절 교수되기 아주 쉬웠습니다. 박사학위가 있으면 요즘

    상위권인 3개 대학을 제외하면 골라서 교수가 될 수 있었고

    서울의 유명한 H 대학 같은 곳에서는 '석사'학위 소지자도

    '조교수'로 뽑겠다고 신문에 광고를 낼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니 '유학 갔으면......' 하던 제게 얼마나 흥분되는 일입니까?

     

    더구나 제가 '유학'이라는 것을 가게 된 데 결정적인 자극을 준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직도(25년째) 공부만

    하고 있는 중학교 동창인 친구 입니다. (이 글은 2005년에 쓴

    것이고 옮겨 쓰는 현재(2009년 9월)는 공부를 마치고 한국의

    모 연구소에서 북한 학의 대가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무얼 그리 '자세히' 하는 지 아직도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2004년)에 이 친구를 만나서 해준 얘기가 있습니다.

    "남들은 학위를 받고 나서 진짜 열심히 공부하던데 너는 왜 공부를

    다하고 학위를 받으려 하느냐? 공부는 끝이 없고 평생을 해도

    모자란다는데...... 그러면 학위는 언제 받느냐? 빨리 끝내라......"

    아마 그때 이 친구가 25년간 공부만 할 줄 알았다면 저는 유학을

    안 갔을 겁니다. 어떻게 '공부만' 합니까? 반 평생을?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한 이 후 나이 50이 넘도록 공부만

    하고 있으니까요.

    이 친구가 택사스 어디엔가로 유학을 가서 제게 보내온 엽서에

    ‘니도 유학 와서 공부 좀 더하면 어떠냐?’ 라고 써 있는데

    정말 가고 싶었습니다. 외국대학의 학위를 하나 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 '여동생'

    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아는 동생이 유학 와서 자기네 집에

    있으면 생활비를 상당히 절약할 수 있으니 적은 비용으로 공부할

    수 있지 않겠냐고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유학준비에 들어 갔습니다. TOEFL(처음엔 이걸 뭐라고

    읽는 줄도 몰랐습니다.), GMAT(아직도 이 단어가 정확하게

    무슨 말의 약자인지 아삼삼 합니다.) 시험준비와 '학교 찾기'에

    들어 갔습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시절엔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고 또 on-line 원서제출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때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Barons’인가? 하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MBA' 라는 책을 보고 '경영대학원'을 찾기 시작했죠.

    New York 지역의 학교가 우선 이었죠. (동생네가 있었으니까요.)

    그 다음은 만만한 학교...... 이렇게 해서 한 12곳을 선정해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원서' 보내달라고요. 그러면 짧게는

    2주, 길게는 '한달 반'만에 두툼한 봉투가 날아 옵니다. 원서와

    학교안내책자 등......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곳은 '버클리'대학

    입니다. 이놈의 학교는 엽서 한 장 딸랑 왔더라 구요. 뭐라고 쓴 줄

    압니까? "우리학교에 지원하는 외국인 학생은 Toefl, GMAT 모두

    600점 이상이 되어야 입학을 고려하니 귀하가 이 조건을 충족하면

    원서요청 편지를 다시 보내세요......" 점수가 안되면 우표 값 아끼자는

    거죠. 열 받지만 할 수 있습니까? 점수가 안 되는 것을......

    요즘 젊은 학동들은 영어를 무척이나 잘 해서 점수를 잘도

    받습니다 만, 그 때 제 점수로는 지금엔 아무 대학원에도 못 갈

    형편없는 점수 였습니다. 그 당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을 요즘

    만나면 "그때 빨리 유학 가길 잘했지, 요즘엔 Admission 도 못

    받았을 걸?" 하고 웃습니다. 요즘 유수한 대학원에서는

    700점이 신입생의 평균이라고 하니까요.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결정한 곳이 New York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Business Administration 이었습니다.

    요즘엔 Stern School 로 잘 알려진 곳이죠. Stern 이라는 분이

    '2천만 달러'(240여억원)를 기부하고 이름을 바꿔버린 거죠.

    이거 다시 바꾸려면 한 5천만 달러 기부해야겠죠?

     

    그때가 1982년 6월 초 였습니다. 5월 말경에 '추천서'를 써 주신

    부서의 '이 광우'부장님이 "야, 니는 안가는 기가?"하고 묻길래

    "아직 원하는 대학서 입학허가를 못 받았습니다. 한 며칠 더

    기다려 보고 가든 말든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회사에서 유학을 준비한 녀석이 3명 이었는데

    2명은 저와 입사동기, 한 명은 1년 늦게 들어 온 친구 였습니다.

    그런데 두 녀석 들은 어드미션을 받았고, 그 중 한 녀석은 사표를

    내고 회사를 그만 두었으니 그 부장님이 절 보기에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추천서까지 써 주었는데 얼마나 띨띨하면

    입학허가도 못 받고 있을꼬???" 하셨겠죠.

    그런데 그로부터 3-4일 후 한 통의 편지가 날아온 것 아닙니까?

    New York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Business

    Administration 으로부터 말입니다.

    Dear In Keun Park,

    I am very pleased to inform you.... 이렇게 시작한 편지를

    보는 순간 제 몸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입학거절의 경우에는 We are sorry ...... 이렇게 편지가 시작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sorry 라는 글이 안 보이는 것을 확인한

    순간 온 세계가 제 가슴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나도 간다! 나도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라고

    소리치고 싶었는데 동네사람들 기 죽일까봐(당시 장안동

    시영아파트 11평짜리 집이 저의 신혼 집 이었으니까요.) 혼자서

    속으로만 웃었습니다. 환희의 웃음을 말입니다.

     

    미국비자 받기.

    일단 회사에는 알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강 영성' 선배(당시 담당대리)에게 귀띔을 했습니다.

    '입학허가서'를 받아서 유학가게 됐다는 것과 7월 하순경 회사를

    퇴사하겠다는 것도 알려드렸습니다 다. 물론 추천서를 써 주신

    부장님께도 알려드렸습니다. 추천서가 효력을 발휘 했다고 말입니다.

    그 당시 비자 받는데 가장 큰 고민이 예금잔액 증명서 입니다.

    이것도 강 선배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고. 미 대사관 앞에서

    새벽부터 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요즘처럼 인터넷 예약

    같은 게 없었습니다. 마냥 줄 서서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다

    3명의 면접관 중 한 명에게 가서 인터뷰를 하고 그 자리에서 합격,

    불합격의 판정을 받는 것입니다. 비자 발급 여부가 결정되는 겁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나도는 소문은 빼빼 하게 생긴 분은 까다롭기

    한이 없고 옆에서 통역 겸 보조하는 한국인 직원은 자기가 '대사'인양

    윽박지르고 ...... 이런 소문이었습니다.

    유학 가겠다는 녀석이 통역을 통한 비자 인터뷰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 궁리 저 궁리 하면서 예상질문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준비해 갔지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고요.

    3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더듬거리는데......

    "Fine!" 하면서 여권과 비자신청서 양식을 빼고 나머지 서류를

    돌려주는 게 아닙니까?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2일 후에 (비자스탬프가 찍힌)여권을 찾아가면 된다.’고 합니다.

    줄 서있는 사람들의 무수히 많은 부러운 눈빛을 뒤로하고 대사관을

    나오는데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데도......)

     

    이것 저것 준비하고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짐을 부치고. 짐이라고 해 봤자 옷가지와 '타자기'(요즘 청춘들은

    타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그때 타자기는

    유학생의 필수품 이었고(원서 등 쓰려면......) 대부분 쓰던 것을 갖고

    갔지만 가 보면 그게 얼마나 헛 고생인줄 알게 됩니다.) 등 입니다.

    '타자기'. 내가 쓰던 것은 수동 이었는데 미국에 가보니 같은

    값이면 IBM ball 타자기(놀라지 마시라 82년 당시 국내 가격이

    200만원을 넘었다.)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열 무지 받았습니다.

     

    7월 19일 회사에 사표를 내고 인사하고...... 아내와 소연(딸)이를

    대리고 '화진포'로 휴가를 갔다 왔고......

     

    1982년 8월 2일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드디어 장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김포공항 풍경은 가족 중 누가 해외로 가면

    온 가족 모두가 공항에 나가 전송하고 공항에서 사진도 찍고 하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죠. 한 12명이 전송을

    나왔으니까요. 부모님, 아내, 소연, 장인, 누나들, 친구들......

    출국장으로 들어가려니 갑자기 눈앞이 흐려 졌습니다.

    '군대 갈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눈앞이 흐려지다니......'

    아내와 딸아이(소연)를 남겨두고 이역만리 타국으로 유학 간다는

    것이 가슴 한쪽을 아리게 만들었습니다. 아내는 소연이를 안고

    아빠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게 하려고 발버둥 치는데......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 가보는 출국장, 눈이 휘둥그래 졌습니다. 그때만 해도

    해외여행객이 작아서 인지 요즘처럼 붐비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들떠있는 분위기 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는 근로자

    아저씨들, 상담 차 출장 가는 회사원들 그리고 저처럼 유학 가는

    학생들, 가슴아프게하는 장면은 이런 게 아니라 낯선 사람 품에

    안겨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양부모를 찾아가는 '어린아이'들

    이었습니다. 저도 여비를 아끼려고 입양아동을 양부모에게

    데려다 주는 임무를 맡을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아 포기 했습니다.

    요즘은 그런 게 없습니다만 그때는 출국장 안에 '조국을

    잊지 말라'는 취지로 조그만 태극기를 나누어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태극기를 하나 집어 들었습니다. (이 태극기는 미국에

    있는 동안 저의 책상 앞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제가 강한 애국자라서 그걸 집어 들지는 않았고

    그걸 보면 한국이 생각나고 가족을 생각하면서 유학의 본 뜻을

    잊지 말자는 취지 였습니다.

     

    대한항공 747 점보기. 비행기가 그토록 큰 줄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저 하늘 높이 날아가는 비행기만 보아왔으니

    400명 이상 타는 비행기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지요. 먼저 해외여행(출장)을 몇 번 한 형님에게

    자세한 조언을 들었지만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안내방송도 낭랑한 목소리로 한국어, 영어, 일본어......

    그런데 영어로 하는 안내방송이 항공사 이름 외는 제대로 들리지

    않더라고요.

    영어를 쓰는 나라로 유학 간다는 녀석이 영어 안내방송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니......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러다 미국에서 입국도 못하고 쫓겨나는 것은 아닌지......'

    면세품 점에는 웬 물건이 그리도 많은지...... 그것도 사치품(?)으로

    알려진 명품들이 산 같이 쌓여 있는데 정말 탐 나더라고요.

     

    비행기에 올라 탔습니다. 요즘의 '이코노미 석'은 대접이 형편

    없습니다만 그 당시 이코노미 석은 대접이 쌈 쌈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22년 전 편도요금이 64만원 이었으니 지금 가격과

    비슷했고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그때 요금이 엄청 비쌌으니

    대접도 잘해 주었겠죠. (요즘도 보통 뉴욕왕복 요금이 140만원

    정도이니까요.) 기내 슬리퍼, 수면용 안대, 조그만 선물 등 요즘의

    '비지니스'클라스의 대접을 그때는 '이코노미'에서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낙하산'이 없습디다.

    사고 나면 메고 뛰어 내려야 할 낙하산 말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여객기에는 낙하산이 없더라고요.)

     

    비행기가 계류장을 떠나 활주로로 향했습니다. '이 큰 게 무사히

    뜰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만 활주로를 박차고

    가볍게 뜨더라고요. 목표는 '앵커리지' 입니다. (요즘엔 중간기착

    없이 서울-뉴욕을 쉬지 않고 가지만 그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앵커리지에서 한번 쉬고 입국신고하고 그리고 뉴욕으로 다시

    날아갔습니다.) 비행기가 뜨고 한 10분쯤 있으니 따뜻한 수건을

    주는데 뭔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 거리니 다들 손을 닦고 있길래

    같이 닦고, 밥 주면 밥 먹고(기내식이 그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요즘엔 입맛이 좀 까다로워 져서 '맛이 덜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만 기내식은 남기지 않고 다 먹습니다.)

    영화도 하더라고요. 제목은 잊었지만. 위스키도 마시고, 맥주도

    청해서 마시고 하다 보니 어둠 속을 뚫고 가던 비행기가 아침을

    맞이하더군요.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게 '비행기에서 아침맞이'

    입니다. 그 색깔이나 광경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군요. 구름이

    어우러지면 그 경치는 더욱 황홀하게 다가옵니다. 눈 덮인

    '맥킨리 산'(8월 이지만 제 기억엔 정상 부근에 눈이 덮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을 구경하다 보니 비행기가 착륙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포를 떠난 지 7시간 정도 지난 후 였습니다.

     

    '앵커리지', ‘미국’...... 오긴 왔나 봅니다. 입국장에서 I-20 form 이

    들어있는 봉투와 함께 여권을 내밀자 직원이 간단한 질문 몇 개를

    하더라고요. 긴장을 해서인지 김포 출국장에서 잘 안 들리던

    영어가 잘 들리더라고요. "Good luck!" 이라며 뻘건 도장을 찍는

    이민 국 직원에게 "Thank you!" 하고 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1차 관문을 통과한 거죠. 미국이라는 나라에 입국이

    되었으니까요.

    2차 관문 세관검사. 커다란 이민가방 두 개를 끌고 줄을 따라 가며

    '멸치'를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라 걱정이 태산 이었습니다.

    보통경우 짐 검사를 안 하지만 가끔 '이민가방'을 들고 오는 유학생

    가방은 조사하기도 한다는 사전지식 때문 이었죠. 줄 서서

    기다리며 초조해 하다가 미국 교포 같이 생긴 여자분에게 물었죠.

    "저, 여기 마른 멸치가 있는데요. 영어로 뭐라고 하죠? 그리고

    마른 멸치는 통관 안되나요?"

    "걱정 마세요. Dry fish 라고 하면 그들도 알아듣고 통관해 줘요,"

    이 말이 얼마나 반갑든지 모든 걱정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가방을 열지 않고 통관되었고 다시 짐 싣는 벨트에 가방을

    올려 놓으니 그제서야 주위가 눈에 들어 오더군요.

    '미국 사람들' 동양인과 다른 모습의 그들을 보니 미국에 입국하긴

    했나 봅디다. 비행기가 다시 뜨기를 기다리는 2-3시간 동안

    여기저기 들러 보았습니다. 면세점에서 다시 한번 눈이 휘둥그래

    졌습니다. '선물용 밍크 세일' 한글로 써 있었습니다. 대단한

    장사꾼 이었습니다. 온갖 모피 상품에 한글로 가격과 제품이름을

    써 놓았더라 구요.

     

    공항청사 옥상에서 느낀 '앵커리지'의 공기는 청량하기만

    했습니다. 한국의 10월 같은 기온에 상쾌한 새벽공기는 여행의

    피로를 저만치 달아나게 해 주었습니다.

     

    다시 비행기는 뉴욕을 향해 날았습니다. 한 세시간쯤 날았을까,

    잠이 설핏 들었는데 비행기가 요동을 치기 시작 했습니다.

    "자리로 돌아가 안전벨트를 매세요." 하는 메시지가 나오길래

    바짝 긴장했죠. 비행기는 계속 흔들리고 갑자기 푹 가라앉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스튜어디스'들을 보니 전혀 긴장하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이 "기류를 잘 못 만나 좀

    흔들립니다."라고 하더군요. 안심했습니다.

     

    11시의 JFK 국제공항은 한국 유학생의 '기'를 콱 죽였습니다.

    계류장으로 가는 비행기 창 밖으로 본 공항청사의 불빛은 김포의

    열 배쯤 되 보였습니다. 마중 나온 동생네(아직 미국에 삽니다.)를

    만나 짐을 찾고 덩치도 큰 '링컨 콘티넨탈' 트렁크에 이민가방

    두 개를 싣고 Bayside 로 향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베이사이드'는

    뉴욕의 상류층이 사는 동네 였습니다. 당시 동양사람이 근처에

    두 집뿐이었으니까요. 요즘엔 돈 번 한국인들이 많이 살더라고요.)

    가로등 없는 고속도로만 보아오다 가로등이 휘황찬란한 도로를

    달리는 차 속에서의 느낌은 "정말 더럽게 잘 사는 나라구나!!!"

    였습니다.

     

    뒤치닥 거리며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밤을 보내고 '맨하탄 구경'을

    갔습니다. 토요일 아침의 맨하탄은 '지저분 하구나.' 였지만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건물들을 보는 순간 또 한번 기가

    팍 죽었습니다. 그 당시 31층의 '삼일빌딩'이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 이었는데 차창으로 휙휙 지나가는 건물들 대부분이 50-60층

    이었으니까요. "자꾸 쳐다보지 마세요. 들키면 돈 내야 되요."

    매제가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그때는 얼른 고개를 내렸다니까요.

    벌금 낼까봐.

     

    일요일 아침, 'The longest parking lot in the world.'라는 별명을

    가진 495번 도로를 타고 Beach로 갔습니다. Long Island를

    가로질러가는 도로를 한참 달리니 beach가 나타나기 시작

    했습니다. Oak Beach, John's Beach 등등... John's Beach에

    갔습니다. '해운대'백사장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닷가 라는 말이

    '말짱 꽝'이라고 각인되는 순간 이었습니다. 백사장 길이는 물론

    관리상태도 정말 부러웠습니다. 주차장, 사워시설, 사람 옆에 와서

    앉는 갈매기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이 사흘을 미국에서 보낸 한국 유학도의 '미국에 대한 생각'은

    이것 이었습니다.

    "땅 엄청 넓고, 도로 부럽게 잘 만들었고, 전화시설 끝내주는

    나라."

     

    *미국 내에서 여행은 다음 편에 계속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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