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 여행 사진

'만리포' 캠핑

벤.요수 2009. 4. 9. 07:39

*** 만리포 캠핑*** 
     (순서가 좀 바뀌었습니다. '나이아가라'가 먼저 나왔습니다.)

 


"무전여행" 이라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
요즘 이런말을 하면 '좀 이상한 놈' 취급을 하겠지만 그 옛날
'1960년대, 70년대 초' 즈음엔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도 않았고
주로 대학교 형아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전국 각지를 돌아
다니는게 보통 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전(無錢)"은 아니고
무전에 가깝게 돈을 거의 안쓰고 여행을 하는 거지요.
그 당시 젊은이라면 으례 한번은 그런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들을 했으니까요. 요즘 '해외 배낭여행' 이나 '해외 어학
연수'가 대학생들의 필수 과정화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 시절만 해도 "대학생"은 사회적으로 과분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교 숫자도 적고 또 대학생도 귀한 시절
이었으니까요. '대학교 학생증'이 술집의 훌륭한 외상 담보로
통했고, 당시 서슬이 퍼렇던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에서도
순경아저씨(짭새가 아닙니다.)들이 대학생들에게는 조금
느슨하게 적용해서 봐주던 시절 이었습니다. 물론 대모를
심하게 해서 '휴교령' 같은 게 내려지고 '시국선언' 등으로
대통령각하의 심기가 불편해 지면 좀 심하게 다루었지만
조금 지나면 다시 우대해 주던 시절이었습니다.


이건 실화 입니다. 장발단속에 걸린 제 친구(당시 연세대
행정과 재학중)가 서대문 경찰서까지 끌려가서 조서를
쓰고 있는데 서장이 인적사항을 보더니 머리를 쥐어박으며
"너, 이담에 뭐가 되려고 머리를 기르고 다니냐 ?" 하고
물었는데, 이 녀석 순간적으로 "행시해서 '서대문 경찰서장'
되려고 합니다." 해놓고는 '아차 ! 내가 지금 어디서 무슨
말을 지껄인 거냐 ???' 하고 후회를 했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서장님이 잠시 보더니
"그래, 공부 열심히 해서 꼭 합격해라 ! 이봐 ㅇ 순경, 그냥
보내줘. 이담에 당신 상관으로 올지도 모르니까." 하고
내보내 주었습니다.
* 당시 행정고시를 붙고, 경찰로 지원하면 바로 서장을
시켜 주었다고 하네요. 지금은 잘 모릅니다 만. **

또 하나는 그 시절(1960년대 후반) 대학 입시철이 되면
온 나라가 시끄럽고(요즘처럼 문제가 어려웠냐 쉬웠냐가
아니라, 누가 붙고 누가 낙방했냐로 시끄러웠습니다.)
합격자 발표를 방송국에서 정규방송 시간에 해 주었습니다.
"다음은 부산대학교 합격자 입니다. 먼저 국어국문학과
3번 김 **, 7번 이 ** ..."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저도 제 큰누나 합격사실을 라디오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가정과" 합격자 발표를 들으며 그 과를 졸업하면
"가정부(식모)"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진짜.(가정과 졸업하신
분들께 죄송합니다 만, 제 누님은 '가정과'출신이 아닙니다.)

이런 시절 고 1 때 무전여행을 꿈 꾸었습니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말입니다. 다행 이었던게 제가 재수를 해서 '경기고'에
입학하니 함께 같은 학교에 다닐뻔한 형이 대학교 1학년이
되어 있었죠.((처음엔 형이 고2로 재학중인 '경복고'에 응시
했습니다. 그런데 떨어지려하니 별일이 다 생기더라구요.
체력시험(그당시 400점 만점에 20점 쯤 되었습니다. 달리기,
턱걸이, 멀리뛰기, 공 던지기 이렇게 4종목으로 기억됩니다.)을
보는 데 달리기를 하다 넘어지기까지 하더라구요. 물론 전날 온
눈을 제대로 치우지 않아 눈 쌓인걸 처음 본 부산놈이 눈위를
뛴다는 게 무리였습니다 만.)) 그리고 사촌동생이 같은 고1,
(재수 안했음.) 동네친구 두명 고 2, 이렇게 다섯 악동이 방학때
'만리포'로 캠핑 겸 '무전여행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준비물도 만만치가 않더라구요.
텐트, 여비, 쌀, 부식 등등....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1970년대 초에 학생이 정기적인
용돈을 받는다는 것은 서민가정에서는 상상도 못하고
그저 필요할 때 한푼, 두푼 받아서 조금 아끼고 하는 게
그 당시의 용돈 모으는 방법 아닙니까 ?
이런 용돈을 한 4개월 모아서 남대문 시장에 가서
2인용 텐트 하나 장만 했습니다.
그 텐트값 속에는 사전, 콘사이스, 딕셔너리 값 등이
모두 녹아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엔 요즘처럼 '코오롱 텐트'등의 폼나는 게 없었고
있어도 사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요. 재수좋게
무역회사(수출)에 다니는 부친이나 삼촌을 둔 친구는
요행히 샘플 하나 얻으면 그게 왕초 입니다. 켐핑장에
전부 국방색(짙은 녹색 계통의 군수품 색깔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A형텐트 일색이고 심지어는 그냥 천을
짤라서 텐트처럼 치고 지내는 청춘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차비도 근근히 만리포 갔다올 정도의 차비를
마련 했구요. 쌀은 집에 있는 것 좀 푸고 그 다음 부식은
각자 어머니를 졸라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도 고교, 대학생인
아들 둘이 켐핑을 간다고 고추장을 뽁아서 커피병에
가득 담아 주셨고(뒤에 얘기 하겠지만 그 맛있는
볶음 고추장을 반밖에 못억었다는 것 아닙니까 ?) 야채도
사 먹으라고 돈도 조금 주시더라구요.

드디어 출발입니다. 네 녀석이 베낭 하나씩 울러메고
인천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그때는 전철이 없었음)
'하인천'역에 내려 연안부두로 갔습니다.(노래에 나오는 그
연안부두 입니다. '어쩌다 한번 떠나는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있길래 가는 사람.....' 하는 그 노래 말입니다.)
만리포행 배를 타기 위해서죠.(이왕 가려면 이것 저것
다 타 보기로 하고-물론 바로가는 시외 버스가 있었으나)

만리포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만리포로 가는 청춘이
우리들외는 별로 없을 거라는 기대는 완전히 빗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어찌그리 많은지 배가 떠날 무렵엔 '이 배가 안
빠지고 만리포까지 갈 수 있을까 ?' 하는 걱정이 될 정도로
많이 태우더라구요. 꾸역꾸역...

드디어 고동 소리도 요란하게 울리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만리포를 향하여....
"갈매기 울어울어 젊은 꿈을 싣고서...."
(만리포 사랑 인가요 ? 그 노래 한 수십번 들었을 겁니다.
만리포 도착할 때 까지요.)
햇볕 쨍쨍 내리 쬐는 여름날 우리가 탄 배는 만리포를
향하여 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여기 저기서 기타줄이 울고
노래를 부르는 청춘, 그리고 배위에서 용감하게 '뚜꺼비'를
잡는 고등학생 또래의 청춘, 타이타닉 장면은 아니지만
연애질 하는 청춘(이때 연애질은 그저 청춘 남녀가 손 잡고
얘기하는 정도 입니다.) 온갖 청춘들이 때로 모여 만리포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 입니까. 부산 놈이라 배 타는데는 자신있다고

자부를 하고 일부러 배를 타자고 우긴 게 이몸인데 배가 출항한 지

한 1시간 쯤 지나고 부터 속이 이상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지럽기도 하고... 그때부터 옆에서 키타치며 부르는

'해변으로 가요 !!!!' 하는 노래는 시끄럽기만 하고 하늘에서는

태양이 한 12개쯤 떠서 나의 머리위를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만사가 귀찮아 졌습니다. 그때부터 그놈의 배는 왜 그리도 느리게
가는지. 제가 헤엄을 쳐도 그 보다는 빨리갈 것 같은 생각도
들구요. 만사가 귀찮아 그냥 갑판에 널부러져 누웠습니다.
같이 가던 일행도 의리없이 나 혼자 놔 두고 키타치며 노래를
부르고 낄낄대며 즐기더라구요. 야속하게시리...

한 한시간 쯤 사경(?)을 헤맸나요 ? 갑짜기 저의
베낭 속에서 "뻥"하는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노래부르며 악을 쓰던 주위가 갑짜기 조용해 졌습니다.
저도 비몽사몽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더 이상 추가 폭발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조심조심 베낭을 열었습니다. 아 ~~~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볶음 고추장이 땡볕을 받아 팽창하고 또 해서
뚜껑을 날리며 베낭안을 고추장 범벅으로 만든 소리였습니다.
텐트나 옷에 고추장이 묻었다는 것 보다 병에 얼마나 고추장이
남아 있는가에 우선 신경을 썼습니다. 반찬이 없으면 맨밥을
먹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니까요. 다행히 반은 남아
있었습니다. 주위에 흩어진 고추장을 딱아내고... 냄새는 또
어땠겠습니까. 열을 받아 한껏 발효된 고추장냄새...
주위 2미터 이내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그 원 밖에서
제가 하는 사후 수습광경을 쳐다보고 있을 뿐 이었습니다.
배멀미가 어디로 날아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이 들었습니다.
심하게 쪽이 팔리면 병도 달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때
배웠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서해안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습니다. '황해' 라고 하길래 인천 앞바다처럼 누런
물이 온 바다에 가득한 줄 알았는데 만리포 앞바다는
경치가 정말 좋았습니다. 그래도 고추장 폭탄 덕분에
한 30분이나마 만리포 경치를 만끽하며 포구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3박 4일은 꿈같은 시간 이었습니다.
잠 실컷자고 수영하고 밥먹고 놀고 밤이면 모닥불 피우고
노래하고... 그당시 유행하던게 '기타'와 '포터블 턴테이블'
이었는데 학생들의 여행이나 야유회의 필수품 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그 당시 '기타칠 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유행했겠습니까 ? '포터블 턴테이블'은 요즘 젊은 청춘들은
모르겠지만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를 보면 '가리봉동 청춘'
들이 냇가에서 춤출때 요즘의 노트북 컴퓨터 같은 데
CD 가 아닌 LP판을 올려놓고 틀던 것 입니다. 그당시
유행하던 노래가 "Na na hey hey kiss me good bye' 인가
하는 노래 '해변으로 가요.', 'Cotton Fields' 등이 죽이는
노래였죠. 물론 밤 바닷가에서 여학생 옆에 앉혀놓고 기타를
(쇠줄이 아니라 프라스틱줄이 달린 기타. 소리가
부드럽습니다.) 튕기면서 '바닷가의 추억'을 한 곡조 뽑으면
그 여자 청춘은 '뿅'갔죠.

낯의 해수욕은 또 어떻습니까 ? 요즘엔 촌스러워 쳐다도 안볼
비키니(요즘의 튀는 청춘은 끈 같은 비키니를 입어 시선을
끕디다만 그때는 비키니는 외국의 청춘들이나 입는 것이고
'동방예의지국'의 요조숙녀는 '수영복 박물관'에나 있음직한
원 피스 수영복(그것도 수영복만 있는게 아니라 허리 아래는
치마 같은게 붙어있는 촌 스러운 것)만 입을 때였죠.)를 입은
용감한 청춘이 나타나면 우리 한 껏 뻗치는 '학삐리'들은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자갈밭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눈 굴리기에 여념이 없고 그랬죠. 그 비키니도 남자들의
'사각팬티' 같은 후진 것이고 윗도리도 요즘의 브라자 보다
더 섬유면적이 넓은 것인데도 그때는 그걸 입은 여자를
쳐다만 봐도 황홀했습니다. 색깔도 짙은 파랑색 등이 많아
재미가 별로 였지만 가끔 '흰색'이나 '노랑색'을 입어 눈을
황홀하게 만들어 주는 자상한 여인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왜냐고요 ? 그걸입고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본인은
알고 일부러 그러는지 몰라도) 물에 젖은 천조각을 통해 
보이는 부분이 있었으니 얼마나 황홀했겠습니까 ?

캠핑장에 있는 공중변소는 또다른 황당한 곳이었습니다.
전형적인 '푸세식' 변소에 남여공용이며 남자 소변은
고랑같은 곳에 횡대로 서서 일을 보고, '큰 것' 또는 여자들은
나무로 만든 개별칸에서 일을 보는데 전체가 나무로 되어
있으니 그게 제대로 있겠습니까 ? 앞뒤로 누가 뚫어 놓았는지
구멍이 있고 변기도 없이 구멍만 파인 아래는 배설물이
산 처럼 쌓여 잘못 쪼그려 앉으면 내가 일을 보기전에
쌓인 게 먼저 내 엉덩이에 닿을 것 같은 불안감으로 일을
보니 제대로 되겠습니까 ? 변비 안걸린게 다행이죠.
여자들은 더 했겠죠. 화장지라도 넉넉히 준비해 간 분은
앞뒤로 구멍마다 화장지로 막고 '전후경계'하면서 일을
보았을 테고 그마저 여유가 없는 분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일을 보았을 테니까요.....

그런 즐거움이 끝나갈 무렵 여행일정에 대한 '긴급논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기회가 다시 안 올테니
이 기회에 '부산'까지 갔다오자."고 제안을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계획은 '홍성'에서 동네친구(홍성서 서울로 와서 공부하던
친구 임)를 만나고 서울로 오기로 했는데 이런 깜찍한 제안을
하니 모두 솔깃 한거죠. 돈은 ? "홍성까지 걸어가고 거기서
천안가는 버스타고 천안가서 밤차타면 부산까지 갈 차비는
된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이거 였습니다. "일단 홍성에서
집으로 전화를 해서 부산 갔다 오겠다. 서울가는 차비는 부산
삼촌에게 빌려쓰고 서울 가서 보내기로하자."
만리포에서 홍성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만 고등학교 1학년이 베낭을 메고 걷기에는 너무나
먼 길이었습니다. 다리가 마비되는 줄 알았으니까요.

홍성에서 집으로 연락하니 천우 신조로 이모님이 볼일이
있어 부산가니 그 편에 차비를 보내주시겠다는 기쁜소식을
접할 수 있었고 우리는 친구 집에서 저녁을 먹자마자
천안역으로 내 달렸습니다.(물론 버스타고)

부산서 2박하고 현지중계된 차비로 그 당시 운행을 시작한
'고속버스' (그 시기에 고속도로가 완공이 되었습니다.)를
타고 서울로 가기로하고 그 유명한 '개 그린'(Ge green 이
아니라 '개'가 버스 옆면에 그려진 Grey Hound 버스)버스를
탔습니다. 그 버스 안에는 뒷편에 '화장실'이 있었죠. 그리고
요즈음의 '항공사 스트어디스'보다 더 예쁜 '안내양'이 있어
사탕도 주고 했으니 얼마나 좋은 버스 입니까 ?
그 그래이 하운드 버스는 한 10년 장사를 잘 하고 영업권과
버스를 국내업체에게 넘기고 철수 했습니다.
가로등도 없는 고속도로였지만 막히지안고 그야말로
고속으로 달리는 버스에 탄 기분은 '짱' 이었습니다.

이렇게 첫 캠핑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