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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에 그친 브라질 여행

벤.요수 2009. 3. 29. 15:21

*** 불발에 그친 '브라질' 행 ***

국민학교 3학년 때(그 이름도 거룩한 '부산 남일 국민학교'에
다녔다.) 같은 아파트(우린 아파트라 불렀지만 지금 생각하면
목조로 된 '주상복합 다가구 주택'이라고 불러도 아주 잘
불러주는 셈이 될거다. 지금은 재건축으로 사라 졌지만
부산시 중구 부평동 시장 초입에 그 건물이 있었다. 중앙에
출입구가 있고 양쪽으로 1층엔 미장원, 달걀 도매상, 채소가게
등이 있고 2.3층엔 양쪽으로 4집씩 16가구가 사는 요즘의 '시영
아파트'보다 못한 아파트가 있었다.)에 나와 같은 3학년이 두명
더 있었다. '김 상국(상원)'이라고 지금은 카나다 '밴쿠버'에 사는
친구와 '함 길운'(이 친구 소식은 모른다.)이가 있었는데 어디나
동네 꼬마들이 모이면 전쟁놀이(이웃동네와)를 하고 죽이맞는
셋이 모이면 당연히 '삼총사'가 탄생하니 셋은 두말 할 것 없이
삼총사 였다.

우리 셋 사이엔 이런 웃지못할 '고무신 사건'도 있었다.
1960년대 초, 그때는 어린애들 신발은 '고무신' 과 '운동화'
두 종류가 있었다. "그 게 뭐가 기록에 남길 일이냐 ?"하면
달리 할 말도 없지만 그때 고무신 종류는 '흰색', '노란색',
'검정색' 단 세가지가 전부였다.(내가 아는 한) 그리고
운동화는 '흰색' 과 '검은 색' 두가지 뿐 이었다. 물론 그때도
'삼화고무'니 '기차표, 동양고무' 니 하는 브렌드가 있었지만
그건 단지 운동화나 고무신 바닥에 인쇄나 각인이된 상표에
불과하고 모양은 어느회사 제품이나 다 똑 같았다.
운동화는 한반(국민학교, 요즘엔 초등학교) 65명(많았다.
오죽하면 '콩나물 교실'이라는 말이 있었을까 ?) 중에서
5명도 안되는 부자집 애들이 신고 다니고 일반인은(누구나
못 살았으니 '서민' ? 이라는 부류는 없었던 것 같다.) 그저
고무신(물론 어른들은 여러 종류의 신발을 신었으나
애들은)을 신었고, 그 중 형편이 나은 애는 명절때 운동화를
얻어 신는 경우가 있었으나 아무리 아껴 신어도 다음 명절
(설 이나 추석)까지 못 갔으니 중간에는 여지없이 고무신을
신었다.

**이 시절엔 백열전구를 양말 속에 넣고 구멍난 양말을
깁거나. 때뭍은 고무신을 씻어주는 것도 우리들의 어머님들
일 중에 중요한 일에 속할 때였다. **

고무신 사건은 이랬다.
우리 '삼총사'가 살던 부평동에서 한 30-40분을 걸어가면
'충무동' 방파제가 나온다.
이 시절 시장통에서 쌓여있는 고구마더미 가장자리에 있는
고구마를 발로 툭 차서 저쪽으로 날아가면 그 고구마를 쨉싸게
들고 도망가서 그 고구마를 먹던 '도시형 고구마 서리'도
지겨울 때 쯤 삼총사 중 한 녀석이 '낚시질'을 가자고 다른
녀석들을 꼬득이기 시작했다. 사진에서 보듯이 멋진 낚시대와
'찌', '밀집모자' 등 황홀한 도구가 아니라. "낚시 바늘이 달린
낚시줄' 과 '지렁이 다섯 마리'면 충무동 방파제에서 낚시를
할 수 있다."고 우기는 녀석의 말에 우리는 또 한번 도전을
하기로 했다. (그 전에도 '하단'(낙동강 하류)에 '제첩' 잡으로
간다는 말도없이 세녀석이 일요일 아침에 사라져서(말했으면
셋 중 누구 엄마도 허락을 안해 주셨을 거고 오히려 다른
엄마들에게 얘기해서 절대 못가게 했을 것이므로 말 안하고)
오후 늦게 나타나(걸어서 가고 오는 데 7시간, 제첩잡이 2시간)
온 동네를 벌컥 뒤집어 놓은 적이 있었으므로...)

시장통 물고인 도랑에서 어렵게 잡은 지렁이를 신주 모시듯이
하면서 도착한 방파제에는 이미 어른 낚시꾼 들이 상당히
많았고 그 분들은 우리 손바닥 만한 고기도 몇마라씩 잡아
그물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 분들은 우리처럼 그냥 지렁이가
아니라 물고기들이 잘 먹는 갯지렁이를 미끼로 쓰고 있었고
대나무(그때는 한량들만 수입품인 '그라파이트'같은 낚싯대를
썼음.) 낚싯대로 허공을 가르며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랬거나 어쨋거나 낚싯대도 없이 손으로 낚시줄을 잡고
물에 담그어 멸치만한 물고기(몸통에 7개 줄이 있다고
우리는 '칠빠'라고 불렀다.)를 잡기 시작했다. 낚시질이
아니라 방파제 돌더미 사이로 쳐다보고(그때만 해도 충무동
앞바다의 물이 상당히 맑아서 바위틈으로 헤엄치는 조그만
물고기도 보일때였으니...그냥 그 근처로 살며시 지렁이가
붙은 낚시줄을 물속으로 넣고 정말 멍청한(?) 칠빠가 물면
그대로 감아올려 잡는 그야말로 원시적 낚시였으나
처음으로 한마리 낚아 올릴때는 월척한 것처럼 황홀했다.

셋이서 한 대여섯마라를 잡알을까 할 때 한녀석이 "앗,
게다. 큰거 !" 라고 외치자 남은 두녀석은 총알처럼 그쪽으로
가서 그 녀석의 송가락 끝을 주시하려고 머리를 디미는데
"앗, 신발!" 하는 소리와 함께 '게' 보다 더 큰 '함 길운'이의
노란 고무신이 물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가라앉고
있었으니... 우린 입만 벌리고 얼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새로 산지 한달도 안되는 고무신을 용왕님께 제물로 바쳤으니
그 다음에 무슨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상상도 하지못하는
공포만 엄습해 왔다.'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으리라.
그래도 잡았다고 멸치같은 잔챙이 7마리를 낚시줄에 꿰고
한 녀석은 한발엔 노란고무신, 한 발은 맨발로 두 녀석은
아무말도 없이 앞으로 닥쳐올 재난만 생각하며 걸어가는 꼴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내는 게 죽을 꽤'라고 길운이 녀석이 "야, 인근아, 너
떨어진 흰 고무신 있지 ?"(우린 그때 누가 무슨신발을 언제
샀고... 하는 것도 기억할 정도로 친했다. 요즘 같으면 아마
'누가 무슨 게임 프로그램을 샀고..'하겠지.) 하고 묻길래
"응, 아직 집에 있을 거다. 엿장수가 안왔으니까." 라고
대답했고 "그거 나 주라." 하길래 "그래." 하면서 조용히
동네로 들어왔고 나는 살며시 집에 들어가 신발장 구석에
있는 떨어진 흰 고무신을 들고 나왔고, 길운이와 상국이는
노란(똥색) 크레파스를 들고 왔다. 그리고는 흰 고무신이
남은 노란고무신 한짝과 색깔이 같아질 때까지 크레파스를
칠하고 나서 길운이가 신은 고무신을 보니 자세히 보지않으면
색칠한 신발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사히(?) 넘어가는 것 같았고 한 2-3일이 지나자 우린
그런 일이 있었던가 ? 하면서 다른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길운이 누나가 "넌 이제 죽었어 !" 하면서 우리가 노는 곳에서
길운이를 끌고 집으로 갔다. 우린 '무슨 일인가 ?' 하면서
뒤쫓아 가다가. 길운이 엄마가 들고있는 흰색과 노란색 고무신
두짝을 보고는 그대로 오던길로 뒤돌아 도망가기 바빴다.
길운이 고무신을 씻어주려고 비누칠을 하던 길운이 엄마가
비누칠을 할 수록 하얗게 변하는 고무신을 보다 이상해서
바닥을 보니 색깔이 안변하는 노란색은 새 것인데, 색깔이 변하는
흰색은 바닥에 구멍나기 직전이라... 그 다음은 상상에 맡깁니다.

이런 일화를 간직한 길운이네 가족이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브라질 이민'대열에 동참한다고 발표를 했으니
우리 삼총사는 길운이 녀석이 부럽기 한이 없었다. 그때 브라질로
이민을 간 우리 동포들이 그 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시련을
겪었는지는 그 다음 얘기고 우선은 이민을 간다는 사실에 남게될
두 녀석은 길운이를 한없이 부러워 했으니...

"야, 함 길운! 니네 이민갈 때 나도 따라가면 안되냐 ?" 내가 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황당한 말이고, 황당한 생각인지
알 수 있으나 그때는 그만큼 그 녀석이 좋았고 그 '브라질'이라는
나라에 나도 가고 싶었다.

"어, 그래 ? 그럼 우리 아부지한테 얘기할 께."
그때 나는 길운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얘기하면 나도 따라가는 줄
알았다. 진짜.

"어무이, 나 길운이네 이민갈 때 나도 같이 갈랍니다."

"데리고 간다 하더나 ?"어머니는 웃으시며 되물었다.

"야!"

"그래라." 하시는 어머님의 얼굴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해답을 이미 알기에 얼굴에 나타나는 '여유'
인지도 모르고 진짜 브라질로 따라 가게되는 줄 알았으니....

그 후 한동안 길운이네의 이민이 불발로 끝날 때까지
허가만 받으면 나도 머나먼 브라질로 가게 되는 줄 알고
희망에 부풀었으니 '이민가고 싶은 마음'은 그때부터 생겼나
보다...